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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독서평설](지학사)에 연재했던(2001~2003) 글 중의 한 편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1863-1873)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형제나 자식이 없이 죽는 경우 왕실의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경우 왕의 아버지에게 주던 칭호가 대원군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모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그중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대원군에 봉해진 경우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고종의 아버지로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조선말의 어려운 사정을 어떻게 해쳐나가려 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흥선대원군의 집권 과정

19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순조 이후 계속된 세도정치아래에서 정치기강은 문란해졌으며 관리의 부정부패는 계속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열강의 극동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길을 걸어야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철종 때에는 외척세력인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정상적인 권력체계에 의해 국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척세력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왕실의 종친에 대해서는 철저히 통제와 위협을 가했다. 똑똑한 왕족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

왕족이었던 흥선군 이하응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도가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한양의 무뢰한들과 어울리며 생활했다. 상갓집을 돌아다니며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심지어는 안동 김씨 가문을 돌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세도정치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한 행동일 뿐, 사실 그는 장차 이 나라의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 지를 생각하던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철종이 왕위를 계승할 자식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조대비에 접근해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다음 왕을 지명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종이 죽을 경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해 주기로 몰래 약속을 맺고 있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의 의도대로 둘째 아들 명복이 조대비의 명에 의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통치를 대신하는 수렴첨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흥선대원군이 조대비로부터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받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 후 민씨 세력의 견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10년간은 그의 시대였다. 어려움에 직면한 조선의 나아갈 길은 이제 그의 두 손에 놓이게 되었다.


개혁 정책의 추진

조선후기에는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 등 대체로 새로운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정치만은 여전히 권력투쟁이 계속되는 등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19세기에는 세도정치가 계속되어 정치는 부패했으며, 이에 따라 양반관료의 농민에 대한 수탈은 극에 달해 있었다.

우선 부패한 세도정치를 바로잡고 양반관료의 수탈을 해결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 그가 해결해야할 과제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였다.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낸 그로써는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와 문벌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다. 순조이래 60여 년간 계속되어오던 세도정치는 그의 과감한 숙청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외척의 세도가 다시 발붙이지 못하도록 그의 며느리 즉 고종의 왕비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집안의 딸을 선택했다. 그러나 고종의 비가 된 민비와 민씨 세력은 그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어느덧 세력을 키워 또 다른 세도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어렵게 세도정치를 제거했으나 안으로부터 또 다른 세도정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가장 큰 과제가 세도정치의 해결이었다면, 사회적으로는 농촌생활의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었다. 그가 집권하기 전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봉기는 양반관료의 수탈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양반 관료들의 수탈을 철저히 탄압했다. 아울러 수탈의 계기가 된 세금제도를 개혁하였다. 한가지 예를 들면 군포의 부과를 일부 양반계층에게까지 확대하고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또 지방 양반들의 결집 장소이자 농민수탈에 앞장서고 있었던 서원을 정리하였다. 본래는 지방 교육 기관으로서 출발한 서원이 조선후기에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600여 개가 넘는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농민층의 환영을 받았으나 지방 양반층의 반발을 사서 뒷날 그가 물러나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

이러한 내정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 즉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농민층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의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 법전을 새로이 편찬하고 비변사를 폐지하는 등 여러 가지 정치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복궁의 중건 등 왕권의 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이었던 경복궁은 1592년 일본과의 전쟁 때 불에 탄이래 폐허로 남아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아래에서 약화된 왕권을 바로 세우고 왕실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세우는 정책을 추진했다. 거대한 궁궐이야말로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하게 세월을 보낸 그로서는 왕실의 위엄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재정은 이 거대한 정책을 수행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른바 원납전이라는 성금을 거두었다. 말이 성금이지 사실은 강제로 부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과대상이 되었던 많은 양반들이 반발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그는 전국 각지에서 공사에 필요한 큰 나무와 돌을 징발하였으며, 성문을 통과할 때 세금을 내게 하거나, 당백전을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백배 가치를 가진 당백전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물가를 오르게 하는 등 경제 혼란을 초래하여 민중들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민중들의 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그의 개혁정책에 찬성하였던 많은 민중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민씨 세력을 비롯한 양반 유생들은 물론 민중들마저 그의 적대세력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침략 및 격퇴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은 쇄국정책이었다. 즉 외국과의 통상을 제한하고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을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특히 조선후기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개방요구가 강해지자 쇄국정책은 더욱 강해졌다.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으로 중국과 강제로 통상 관계를 맺고, 이어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 역시 1854년 미국의 압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 나라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선은 최강대국이라 생각하고 있던 중국이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인 접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조선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철저히 하여 위기를 극복하려했다. 특히 천주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본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조선인 신도 8천여 명과 함께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처형당했다. 이를 피해 탈출한 프랑스신부가 중국의 프랑스함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보복을 요구했다. 프랑스에겐 침략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전함 7척과 병력 1천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그들의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데 있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한강을 봉쇄하고 조선정부에 통상조약을 맺으라며 협박했다.

조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가 몰래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에 맞서 승리하였다. 프랑스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1개월 여 동안 점령해 있던 강화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많은 책과 금은 등을 약탈해갔다. 우리의 많은 옛 책이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대개 이때 약탈해간 것이다.


미국의 침략 및 격퇴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적으로 접근해온 것은 흥선대원군 집권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성리학적인 전통에 젖어 이들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아울러 미국 역시 조선의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미 강제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킨 바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함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해온 것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구실이 되었다.

1866년 미국의 무장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평안도 관찰사가 돌아갈 것을 경고했으나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약탈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평양군민들이 돌을 던져 공격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1871년 전함 6척과 병력 1,230명의 아시아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침략하여 왔다. 프랑스의 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도가 침략의 대상이 된 것은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미 강화도에는 진과 보 등의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수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이 바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물이다.

강화해협에 접어든 미국 군함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침략했다. 광성보에서 미국 침략군에 맞선 조선군은 어재연을 비롯해 무명용사들이 죽기를 다해 싸웠으나 점령당하고 말았다.

미국은 조선이 전투에서 패하면 당연히 교섭에 응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조선은 응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장기전으로 끌면 프랑스처럼 미국도 물러갈 것으로 생각하고 강경하게 맞선 것이다. 미국 역시 물러갈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으며, 이로써 조선인의 외세배척의 기운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외세배척을 강조하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고히 할 것을 내세웠다. 척화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흥선대원군 정권의 결말

조선후기의 사회는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봉건적인 굴레를 벗어나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역사발전의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만은 여전히 봉건적인 수탈을 기반으로 하는 세도정치에 머물러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여러 가지의 개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세도정치를 제거하고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를 위해 나가는 방향 역시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정치 추세는 합리적인 권력의 수립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 가는 것이 근대사회를 향한 정치적인 노력이었음을 서양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은 오히려 경제의 혼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했다. 이 역시 그의 개혁방향이 여전히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양세력에 대한 그의 강한 쇄국의 의지에 대해서는, 민족의 수호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세와 세계사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는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새로이 변화, 발전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근대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이 스스로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책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저항을 받아 농민봉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세도정치를 제거하기는 했으나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의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민씨 세력은 대원군의 적대세력이 되었다. 또 서원철폐 등의 정책으로 양반 유생들의 반발도 컸다.

그리하여 민씨 세력은 이미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생들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최익현의 탄핵상소를 계기로 1973년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였다. 10년만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집념은 계속되었고, 민비를 비롯한 민씨 세력과 기회 있을 때마다 충돌하였다.

Posted by 백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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